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(문단 편집) ==== [[자유민주연합|자민련]]의 몰락, 양강 구도의 형성 ==== 1995년, [[김종필]]이 민주자유당을 탈당해 세운 [[자유민주연합]]은 [[15대 총선]]에서 반민자-비민주 정서에 힘 입어 무려 '''50석을 차지'''하면서 통일국민당에 뒤이어 3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. 1998년, 자민련과 새정치국민회의는 [[DJP연합]]을 결성에 정권을 교체하였고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등 자민련은 [[한나라당]]과 [[새정치국민회의]] 사이에서 전혀 뒤쳐지지 않는 수준의 위세를 가질 수 있었다.[* 삼김시대는 1960년대부터 형성되었지만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는 박정희, 전두환의 존재로 인해 권력을 크게 잡을 수 없었다. 민주화 이후에도 [[노태우]]를 중심으로 한 민정계의 힘이 4당 가운데 가장 컸다. 따라서 삼김의 세력이 1, 2, 3당을 모두 독차지하여 3개 세력이 맞붙은 것은 삼김시대의 끝물인 1995년부터 2002년 정도가 전부다.][* 따라서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상대적으로 김영삼, 김대중보다 약했음에도 비슷한 수준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, 전두환, 노태우 등 가장 강력한 세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세력은 서로 비슷했기에 김종필은 둘보다는 약하지만 승리의 추를 한 쪽으로 기울이는 것은 가능한 캐스팅보터로써의 힘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.] 이러한 점 덕분에 [[16대 총선]]에서는 한나라당 133석과, 새천년민주당 115석에 자민련은 한참 밀리는 17석을 얻는데 그치며 [[교섭단체]]마저 무너졌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했다. 거기에 여전히 [[김대중]]과 [[김종필]]의 연립 정부가 유지되고 있었고 새천년민주당의 의석 꿔주기[* 2001년 8월, DJP연합이 깨지기 전까지 새천년민주당에서 자민련에 의원 4명을 빌려주었다.]로 어찌어찌 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법적으로는 양당제에 가까웠지만 삼김시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한나라당=경상도, 새천년민주당=전라도, 자민련=충청도라는 지역분할구도의 영향으로 사실상 3당 체제가 유지되었다. 그러나 이번 [[17대 총선]]은 달랐다. 가장 먼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미 은퇴하고 삼김 중 김종필 혼자만 정계에 남아있던 상황이었다. 당시 노무현 정부는 이미 새천년민주당과의 분열로 의석이 반토막 나있었기에 김대중과 달리 자민련의 도움이 필요없었다. 즉, 자민련이 더 이상 연립 정부 구성을 통해 정권을 잡을 방법이 남아있지 않았다. 또한, 한나라당에서 김영삼이 물러나고 [[이회창]]이 총재가 되면서 자민련이 주장하던 원조보수론이 더 이상 TK지역과 보수 세력에게 먹히지 않게 되었다. 이러한 현상은 1998년, [[DJP연합]]이 시작되면서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이는 자민련이 김대중 정부 5년을 거치며 충청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기반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.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린 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입지는 그야말로 처참했다. 정통보수론은 이미 [[한나라당]]에 밀렸고 연립 정부 구성은 [[새천년민주당]]과 [[열린우리당]]의 민주계 분열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새로운 제 3지대로는 [[민주노동당]]이 떠오르던 상황이었다. 자민련이 믿을 것은 오직 충청도의 민심 하나 뿐이었지만 출구조사에서 충청도마저 열린우리당에 크게 밀리며 참패가 예고되었다. 출구조사에서 자민련은 KBS 3~4석, SBS 2~7석, MBC 3~6석이 예상되었고 최종적으로 4석을 얻으며 결과가 들어맞았다. 하지만 이는 자민련이 선거 전략을 잘못 짠 것과 탄핵 대선의 영향으로 자민련이 봉쇄조항 3%를 넘기지 못한 탓이었다.[* 당시 출구조사를 보면 자민련은 [[김종필]]의 예전 지역구였던 부여-청양과 보령-서천 선거구는 압승이 예상되었고 이인제가 논산-계룡-금산에서 선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. 그 외에는 당진군과 서산-태안, 아산 선거구에서 그나마 희망을 보였고 비례대표는 봉쇄조항 3%에 미달로 예측되었다.] 당시 자민련은 비례대표 1번으로 김종필이 나섰는데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. 김종필은 충청도에서는 아직까지 어느 정도 지지가 남아있었지만 그 외 지역의 지지는 대부분 잃은 상태였다. 따라서 충청도 이외의 지역에서 비례대표 1번인 김종필을 당선시키려고 자민련에게 투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발상이다. 차라리 김종필이 당시 경합으로 예측되던 서산-태안이나 아산 선거구에 지역구 출마를 했더라면 훨씬 당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고 자민련은 비례대표에서 3% 득표를 넘지 못해도 지역구 5석을 얻어 봉쇄조항을 넘을 수 있었다. 만약 실제로 성립되었다면 자민련은 지역구 5석 + 비례대표 2석으로 출구조사에서 최대치라고 기록되었던 7석까지는 얻을 수 있었다. 물론 7석이라는 수치도 높은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과 새천년민주당의 9석과 거의 비슷한 수치고[* 자민련이 비례대표를 얻는데 성공했다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의석 수가 1석씩 줄어들게 된다.] 적어도 [[김종필]]의 정계은퇴가 4년 더 늦춰져 자민련이 공중분해되어 처참히 소멸되는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. 또한 이로 인해 김종필도 9선으로 정계은퇴를 하게 되며 '''"10선 의원"''' 달성에는 실패하게 된다. 결론적으로 자민련은 탄핵 대선의 영향과 선거 전략 실패로 김종필 정계 은퇴라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약 10년간 제3당으로써 영향을 행사했던 자민련은 급속히 무너져 소멸된다. 김종필의 정계 은퇴와 자민련의 몰락으로 삼김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당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만이 남아 양강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.[* 이후 양강구도는 2016년 [[국민의당(2016년)|국민의당]]이 [[20대 총선]]에서 38석을 얻기 전까지 한 번도 깨지지 않는다. [[자유선진당]]이나 [[통합진보당]]처럼 어느 정도 선전한 정당도 있었지만 자민련의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으며 국민의당마저 2년도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바른미래당, 민주평화당으로 분당되어 사실상 소멸했음 감안하면 여전히 자민련 정도의 영향력을 보여준 3당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